해병 중위 강길영(1930.9.22 ∼1951.9.)


강길영 중위는 1930년 9월 22일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1949년 4월 5일 해병대를 자원입대하여 소총병으로 진동리전투, 통영지구작전, 인천상륙작전, 서울 탈환작전 등에 참전했고, 그 후 해병 간부 후보생 교육에 입교하여 1951년 3월 3일 해병소위로 임관 후 가리산·화천지구·도솔산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강중위는 1951년 9월 1일 해병 1연대 11중대 선임장교로 보직받아 강원도 양구 전방 펀치볼(양구 북동쪽 전방 25㎞ 지점에 있는 원형분지) 확보를 위한 전술적 요새인 924고지 전투에 참가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치루면서 적탄에 쓰러진 중대장을 대리해 중대의 진두에서 돌격전을 감행하다 전사했다.

강중위의 전사한 모습을 본 중대원들은 비분 궐기하여 총공세를 감행함으로써 마침내 김일성고지를 탈환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투를 "신인(神人)이 경탄할 공훈"이라 격찬했으며 정부에서는 강중위의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해병대 사령부는 1999년 6월 20일, 김일성고지 전투에서 해병의 신화를 남기고 산화한 강중위와 그 대원들의 위훈을 기리고자 격전장이었던 펀치볼지역에 전적비를 세우고 추모식을 거행했다.

심일 소령(1923.6.5-1951.1.26)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지역이 공산화되자, 전 가족과 함께 1945年 12月 자유대한으로 월남하였다.
월남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 2학년을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으로 입교하였다. 다음 해인 1949年 5月 23日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여 춘천지역에 주둔한 제6사단 7연대 대전차중대 제2소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개전 초 북한군은 10여대의 탱크형 자주포를 선두로 춘천지역으로 물밀듯이 진격해오자, 탱크형 자주포의 진출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받은 심 일 소령(당시 중위)은 춘천 북방 지내리 1.5km 지점인 서원고개로 급파되어 2문의 57미리 育猾邰糖?배치하고, 적자주포가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자 사격을 가해 명중시켰으나 적의 자주포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다시 진격해 왔다.
57미리 대전차포로는 적자주포를 파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심 일 소령은 일단 소대원을 철수시키고 육탄공격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화염병을 급히 제조하여 특공조 5명과 함께 적의 탱크형 자주포 측면으로 은밀히 접근하여 선두 탱크형 자주포 2대의 포탑위로 올라가 수류탄과 화염병을 투척하여 폭파시키자, 뒤 따르던 8대의 적자주포는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이와 같은 심 일 소령의 투혼으로 아군은 자신감과 용기를 얻어 육탄공격을 도처에서 감행하였다. 수십대의 적탱크 및 자주포를 파괴시켰으며, 기계화 부대를 앞세워 단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하려던 적의 기세를 좌절시켰음은 물론, 아군이 춘천지역을 2일간이나 방어함으로써 적의 서울방향 진출저지와 유엔군이 증원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 후에도 심 일 소령은 충북 음성지역 전투, 경북 영천 304 고지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국군의 반격 작전이 감행되었던 1951年 1月 26日 강원도 영월지역 전투에서 제7사단 사단수색중대장으로 최일선에서 정찰임무를 수행 중 적의 총격을 받아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서 애석하게도 28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산화했다.

정부에서는 1951年 10月 임전무퇴의 강인한 정신으로 부여된 임무를 끝까지 완수한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함과 동시에 소령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하였다. 한국전쟁 중 위관(尉官)장교로서는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것이다.

김종오 육군대장(1921.5.22∼1966.3.30)

김종오 육군대장은 1921년 충북 청원에서 출생.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소위 임관. 1950년 대령으로 제6사단장에 부임할 때까지 북한군 1개 대대를 유인 섬멸했던 사직리전투 승전 등 큰 공을 세움.
6·25전쟁이 발발하자 6사단장으로서 춘천에서 인제까지 90km에 이르는 광정면을 책임지게 된 그는 지원화기초자 미비한 상태에서 탁월한 방어작전으로 6월 29일까지 춘천 - 홍천지역을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서부전선의 국군 주력부대들이 한강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엔군이 증원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
김장군은 이후 지연전 단계에서도 음성의 무극리, 동락리 전투에서 적 15사단을 기습하여 적 2,186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으며, 북진작전시에는 북한군에 의해 미군 학살현장에서 생존자 20여명을 직접 구출하고 초산의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음.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지역 백마고지에서는 고지 주인이 12회나 바뀌는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처절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음. 그는 당시 9사단장으로서 8,000여명의 사단병력으로 중공 제38군 예하 3개 사단 15,000여명을 격퇴하였으며 적 사상 14,300여명이라는 대전과를 거두었음.
휴전 이후 제1군단장, 5군단장, 제15대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한 그는 1965년 4월 10일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으며, 1966년 3월 30일 4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음.

김금성 공군 준장(1927.11.27 ∼ 1961. 9.11)

김금성 장군은 1927년 11월 27일 충북 충주군 금가면에서 출생. 1950년 10월 15일 공군 소위 임관.
임관 후 제1전투비행단 정찰대에서 L형 연락기로 적정 정찰, 연락, 전단 살포 등의 비행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1951년 10월부터는 강릉기지에서 F-51 전투기 조종사로 출격하였음.
이후 1952년 1월 평양 근교 승호리철교 폭파작전, 같은 해 3월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1953년 3월 351고지 탈환을 위한 근접항공지원작전 등 한국 공군이 출격한 주요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움.
특히 전쟁기간 중 전투비행대대장, 작전과장 등을 역임하며 비행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국 전투 조종사로서는 두번째로 많은 193회를 출격. 작전 중 여덟번이나 적의 대공포화에 전투기가 피탄되었으나 투철한 책임감과 우수한 조종기량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 모든 출격 조종사의 표상이 됨.
6·25전쟁 후에는 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근무하며 공군의 전력증강 및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공군 제10전투비행단장으로 재직중이던 1961년 9월 11일 순직.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과 미국 수훈비행십자훈장, 미국 비행훈장 수상.

고태문 대위(1929∼1952)

고태문 대위는 6·25 전쟁 당시 강원도 양구 전방의 펀치볼(Punch Bowl)고지 동부에 위치한 884고지와 351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고대위는 1929년 1월 3일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에서 태어나 일본 오오사카 제총(帝塚)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예비역 소집명에 의거 군에 입대하여 1950년 10월 22일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1951년 8월 24일 보병 제11사단 9연대 7중대 소대장으로 보직되어 884고지전투에 참가해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으면서도 소대원들을 독려하여 직접 선두에서 육탄돌격과 백병전을 감행함으로써 목표인 884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1951년 9월 1일 중위로 진급한 후 5사단 27연대 9중대장에 보직되어 1952년 11월 10일 351고지 방어전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치루었지만 중과부적으로 끝내 진지 사수가 어려워지자 중대원들을 철수시키고 본인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후 351고지는 전사한 중대장의 부하 대원들이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재탈환했다.

정부에서는 그에게 884고지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화랑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고, 351고지 전투에서의 그의 희생정신과 위훈을 추모하기 위하여 1계급 특진 및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임병래 해군 중위(1922∼50)

임병래 중위는 192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일본군 학병으로 징용생활과, 미 해군 첩보부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했고 1950년 4월 해군중위로 임관하여 6.25 전쟁시 미 해군 첩보수집 특공대 조장으로 참전했다. 임중위가 소속된 특공대는 1950년 8월 24일 영흥도에 작전기지를 편성하고 인천, 서울, 수원 등지를 잠입하여 정보수집활동을 전담했다. 당시 인천에는 북한의 정규부대와 보안기관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UN군의 상륙작전을 예상한 듯 경비와 검문이 강화되어 정보수집활동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임중위 대원들은 요행히도 인천시내에서 6.25전 해군정보국 요원으로 활동하던 북한의 정보요원 2명을 포섭하여 이 지역에 배치된 병력, 장비위치, 경계상태, 지뢰부설 여부 등 중요한 군사첩보를 획득하고 서울, 수원 일원을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적 상황과 군사기밀을 탐지해 우리 해군본부와 극동군사령부에 첩보를 제공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러나 임중위는 인천상륙작전 개시 하루전 9월 14일 아군의 공작활동을 간파한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지연전으로 맞서 싸웠으나 대원들만 탈출시킨 후 퇴로가 차단된 전장 후미에서 적에게 포로가 될 경우 작전에 심대한 영항이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여

본인은 자결로써 최후를 마쳤다.
임중위에게는 미 은성훈장과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됐다. 신명을 바쳐 군인의 본분과 소명을 다한 임병래 중위의 위훈은 호국의 등불이 되어 전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장철부 육군 중령(1921∼50)

장철부 중령은 평북 용천에서 출생하여 1944년 1월 일본 중앙대학교 재학 중 강제로 학병으로 끌려나가 두번 탈출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여 항일 유격대에서 무장독립투쟁을 하면서 일생을 조국 독립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본명 김병원(金秉元)을 장철부로 개명했다.
1945년 5월 김구(金九) 선생의 추천으로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입교, 1947년 2월 졸업하고 귀국하여 1948년 4월 육사5기로 임관 후 소대장, 육사 교관 등을 거쳐 기갑연대가 창설되자 기병대대장(계급 소령)으로 보직되어 근무하던 중 6·25를 맞았다.
1950년 6월 25일 장소령의 기병대대는 의정부로 출동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한 후 한강이남으로 철수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6월 29일 한강을 도하하는 북한군을 공격하여 수백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 2일부터 4일까지 장소령은 과천에서 한강을 도하하는 적의 선견대(先遣隊)를 공격하여 적의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7월 11일 충남 공주에서 북한군 제6사단 1개 대대를 섬멸시키고 북한군 대대장의 지프를 노획했다.

7월 14일 공주 남방 삽교리에서 북한군에 포위된 미군 제63포병대대의 퇴로를 보장하기 위해 적의 측방을 공격하여 철수를 엄호했으며, 7월 15일에는 미군 제24사단 34연대 3대대가 포위되자 적의 후방을 기습하여 구출했다.
8월 4일 경북 청송지구에서 청송-경주로 진출을 기도하는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가 부상한 장소령은 대대지휘소가 점령 당하기 직전 '포로가 되는 수치와 불명예보다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했다.
정부는 고(故) 장철부 소령에게 중령 특진을 추서하고, 다시 1990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라창준 공군소령(1928∼1952)

라창준 소령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여 1943년 원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한 후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1948년 9월 조종하사관으로 공군에 입대, 연락기 조종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라창준 일등상사는 L-4 연락기를 몰고 적의 대공포가 빗발치는 각 전선을 동분서주하면서 정찰, 폭격, 전후방 연락임무 등을 수행하였으며 6월 28일에는 동료 조종사 3명과 함께 여의도비행장에서 미처 철수하지 못한 미군사고문단 소속 L-5 연락기 2대를 구출하여 수원기지로 무사히 귀환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1950년 10월 소위로 현지 임관, 51년 3월 중위로 진급한 후 그해 8월 전투비행단으로 전속하여 제주기지에서 기종전환 훈련을 받고 F-51 무스탕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매일같이 원산, 평양 등 적 후방지역 깊숙이 출격하여 적 전차 및 차량, 보급품 집결지, 군사시설, 군수공장 등을 파괴하는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2년 4월 5일 라창준 대위(1951년 12월 진급)는 진남포지역의 적 보급로를 차단하고 군수공장을 파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편대장으로서 4대의 F-51 전투기를 이끌고 출격하여 1차 목표인 철교와 군사시설을 폭파한 후 2차 목표인 진남포 군수품 생산공장을 공격하던 중 적의 대공포에 피격되자 애기와 함께 적진으로 돌진하여 장렬히 산화하였다.
정부는 1952년 5월 10일 고 라창준 대위에게 소령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도(權永道) 경찰 경위(1926.7.27∼1952.7.13)

권영도 경위는 1926년 7월 경남 산청군 출생. 1941년 금서초등학교 졸업. 이후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
1950년 6·25전쟁 발발시 경남 경찰청 관내 서하특공대에 입대하여 관내 산청군 국수봉전투에서 적 게릴라 150명과 접전 중 결사대를 조직, 23명의 적을 사살하고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순경으로 특채되었음.
이어 산청군과 함양군 일대에서 적 게릴라 20명을 사살하고 13명을 생포하는 등 1952년 6월까지 지역내 게릴라 소탕작전시 항상 선봉에서 활약했음.
1952년 7월 산청군 웅석봉 일대의 게릴라 소탕을 위해 1개중대 규모의 전투 경찰대를 투입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 권영도 경위는 5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여 적의 요새를 공격 섬멸하고 26세의 나이로 장렬하게 전사함.
정부는 6·25전쟁 중 게릴라 소탕에 큰 공을 세운 권영도 경위의 공적을 기려 순경에서 경위로 추서. 정부 포상으로 생전에 화랑무공훈장 수상.


김종식(金鍾植) 해병대령(1926.1.11 ∼ 1991.5.30)

김종식 대령은 1926년 1월 중국 하얼빈에서 출생. 하얼빈 대도관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 광복이 되자 중국에서 단신으로 월남했음.
1948년 3월 해사 후보생 특별교육대 2기생으로 입대하여 동년 9월 해군 소위로 임관한 그는 1949년 2월 해병?창설요원으로 선발되어 1949년 4월15일 해병대 창설 기념식을 거행할 때까지 선발대 요원으로 활약했음.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낙동강지역 진동리 지구 전투에 참전한 그는 수류탄전을 전개하는 과감한 공격으로 적 정찰대대를 기습 타격, 마산으로 통하는 요충지인 진동리를 확보함으로써 전 대원이 1계급 특진하는데 크게 기여했음. 이에 한국 해병대가 수행한 최초의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하여 서울탈환의 최선봉으로 활약했음.
1952년 3월 수도 서울의 관문인 장단지구를 지키는 해병대 전투단 1대대장으로서 대원들을 삭발시켜 비장한 결의로 중공군과 결전을 벌여 큰 공을 세웠다. 전쟁기간 해병대가 수행한 모든 전투에 참전하여 귀신잡는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는데 크게 기여한 그는 휴전 이후 해병대 1연대장, 헌병감을 역임하였으며 1991년 4월 30일 타계.


송요찬(宋堯讚) 육군중장(1918.2.13 ∼ 1980.10.19)

송요찬 장군은 1918년 충남 청양 출생. 고향에서 봉산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군훈련소에서 복무했으며 조국이 광복되자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5월 육군소위로 임관.
임관 이후 6·25전쟁 전까지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을 역임하면서 미군들로부터「타이거 송」이라는 별칭을 들을 정도로 교육훈련의 명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건군 초기 군내 불순세력 척결에도 크게 기여하였음.
6·25전쟁 발발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1950년 9월, 그는 수도사단장으로서 7차에 걸친 북한군의 전면공세를 격파하여 조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음.
이후 반격과 북진 작전시에는 국군의 최선봉으로 38선을 돌파하여 신고산 일대에서 전차와 야포 등 1만여점의 적 장비를 노획, 개전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 휴전 직전에는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전투, 금화·평강·철원을 잇는 철의 삼각지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워 오늘날 수도사단이 맹호사단으로 불리는 전통을 수립하였음.

휴전 이후에는 3군단장, 1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 주요 직위를 역임하고 1960년 5월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으며 이후 1961년 내각 수반 겸임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한 후 1980년 10월 향년 63세로 타계.
6·25전쟁의 명장으로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북진작전시까지 16개 주요전투에 참전, 빛나는 전공을 세웠던 그는 생전에 태극무공훈장 2회,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십자훈장 수상 등 수많은 훈·표창을 받았음

김용호(金龍鎬) 해병중위(1929. 9. 16 ∼ 1952. 11. 11)

김용호 해병중위는 1929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1952년 3월 해병소위로 임관하여 장단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해병 1연대 11중대 3소대장으로 보직되었음.
당시 장단지구는 서울에서 불과 25마일 거리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1952년 4월부터 한국 해병대와 중공군간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음.
1952년 10월 31일 중공군은 야음을 이용하여 4차 대공세를 감행해 왔을 때 김용호 소위는 장단지구 사천강지역 전초진지에서 증강된 1개 소대 75명의 병력으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을 맞아 백병전까지 벌이며 결사적으로 진지를 사수하였으며, 병력 및 화력의 열세로 적이 끝내 진지에 난입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아군에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등 사투를 벌인 끝에 중공군 115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두었음.
그러나 중공군을 격퇴한 후 소대원들이 70명이나 전사한 것을 확인한 그는 "부하를 많이 희생해 중대장을 뵐 면목이 없어 대원들이 잠든 이 고지 위에서 죽음을 택한다"는 짤막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으며 이 때 그의 나이 23세였음.

그의 이러한 책임감과 희생정신, 부하사랑 정신은 해병정신의 표상이 되어 오늘날까지 해병용사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으며, 정부는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함.

김영환(金英煥) 공군준장(1921.1.8 ∼ 1954.3.5)

김영환 공군준장은 1921년 서울 서대문에서 출생. 경기 공립중학교 졸업. 일본관서대학에서 수학. 광복이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1월15일 참위(지금의 소위)로 임관.
임관 이후 그는 남조선 국방경비대에서 중대장과 통위부 정보국장 대리근무를 했으나 당시 국내외 항공계에서 활동했던 인사들과 함께 공군창설의 뜻을 품고 미군정 당국과 협의하여 공군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활약.
6·25전쟁이 발발하자 T-6훈련기를 조종하여 저공비행으로 적 전차와 차량에 폭탄과 수류탄을 던지는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한국 공군 최초로 10명의 동료와 함께 F-51 전투기를 미 극동공군으로부터 인수하여 전투기 조종사로서 수 많은 전공을 거두었음.
특히 1951년 10월 11일 미 제5공군의 단위부대에서 한국공군 최초로 독립된 편대를 이끌고 단독출격을 개시한 이래 1953년 2월에는 강릉기지에서 창설된 제10전투비행단장으로서 탁월한 공군 작전지휘로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과 후방지역 차단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휴전시까지 중동부 전선의 적 전력을 타격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음.

한국 전투조종사들의 영광과 영예의 상징이며 불타는 애국심을 상징하는 빨간마후라를 최초로 착용하여 한국 공군의 상징으로 제도화시킨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휴전이후에도 전투조종사 양성 등 공군전력 향상을 위해 헌신했으며, 1954년 3월 5일 F-51 전투기를 조종하여 사천에서 강릉기지를 향하던 중 악천후로 인해 34세를 일기로 순직.
탁월한 전투조종사로서 불모지와 같던 초기 전투비행단 운영체계를 확립하여 공군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그는 생전에 을지, 충무무공훈장과 미 비행훈장, 미 공로훈장을 받았음

한 신(韓 信) 육군대장(1922.12.27 ∼ 1996.5.6)

한신 육군대장은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 함흥고보 졸업, 일본 중앙대에서 수학, 1946년 12월 육군사관학교 2기로 임관.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수도사단 1연대장으로 최초 의정부전투를 시작으로 한강방어선전투, 진천전투, 안강·기계전투, 38선 북진작전, 대관령전투 등 수많은 격전지를 누비며 명지휘관으로 이름을 떨쳤음.
특히 낙동강 최후방어선의 요충지였던 안강·기계지역에서 철수명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며 북한군 12사단의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우리 국군의 방어선 유지와 반격작전 여건 조성에 결정적인 공훈을 세웠으며, 대관령전투에서는 2일간의 처절한 사투끝에 중공군 1개 사단의 남하를 저지함으로써 공세이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음.
6·25전쟁 이후 그는 수도사단장, 6군단장, 1군사령관, 합참의장 등 주요 직위를 역임하며「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재우는」사병복지 구현과 이를 통한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우리 군의 기강확립과 강군 육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특히 합참의장 재직시 국군 현대화 계획을 입안하여 자주국방의 기초를 세우는 큰 업적을 남겼음.

오늘 죽어도 책임을 다하는 一日一生을 좌우명으로 나라와 군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그는 1975년 육군대장으로 예편 후 아시아자동차회장, 대한중석 사장을 역임하고 1996년 5월 6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타계.
군의 전투준비, 군기확립, 청렴결백의 표상 등 국군의 사표(師表)로 불리웠을만큼 존경을 받았던 그는 생전에 태극무공훈장, 을지·충무·화랑 등 수많은 훈·표창을 받았음

이성가(李成佳) 육군소장(1922.10.9 ∼ 1975.3.15)

이성가 육군소장은 1922년 만주에서 출생. 중국 남경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군에서 소령까지 복무, 조국이 광복되자 서둘러 귀국하여 창군 일원으로 참여했음.
그는 1948년 10월 제4연대장으로서 여수, 순천사건을 진압했으며, 1949년 9월에는 태백산지구 공비를 토벌하는 등 6·25전쟁 전까지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으로 큰 공을 세웠음.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8사단을 지휘하여 단양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6일간이나 지연시켜 소백산맥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고, 영천지역에서는 혈전끝에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함으로써 전세를 반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음.
이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작전시에는 북진의 선봉으로서 공을 세웠고, 51년 9월 이후에는 7사단장으로서 중공군과 혈전끝에 전술적 요충지인 백석산과 크리스마스 고지를 확보하는 공을 세웠음.
휴전 이후에는 5군단장, 육본 정보참모부장,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한 후 소장으로 예편하여 멕시코 대사, 터키 대사, 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하고 1975년 3월 15일 타계.

6·25전쟁기간 호국의 선봉으로 공을 세우고 외교발전에도 헌신했던 그는 생전에 태극무공훈장, 을지·충무·화랑무공훈장을 받았음

김홍일(金弘壹) 육군중장(1898.9.23∼1980.8.8)

김홍일 육군중장은 1898년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 일제시대 한국 의용군 사령관, 중국군 사단장, 한국 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며 항일전투의 선봉장으로 일본군을 소탕하고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했음. 광복 이후에는 실전경험에 바탕을 둔 뛰어난 지휘력을 인정받아 1948년 12월 한국군 육군 준장으로 임관했음.
6·25전쟁이 발발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피탈되자 김중장은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의 중책을 맡아 노량진, 영등포와 한강 남안을 연하는 선에서 북한군 제1군단과 6일동안 한강방어전투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국군이 전략적으로 후퇴하고 미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확보에 지대한 공을 세웠음.
창군이래 최초로 창설된 제1군단의 군단장으로서 진천전투, 화령장전투, 안동전투에서 북한의 남침을 성공적으로 저지해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기여했으며, 안강·포항전투에서는 북한군 2개 사단을 격퇴하여 국군이 반격작전을 개시하는 기틀을 마련하였음.

이후 육군종합학교 총장으로 전시소요가 증대된 육군 간부양성에 힘쓰던 중 1951년 3월 17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으며 이후 중화민국 대사, 제7대 국회의원, 신민당 당수, 광복회 회장, 국정자문위원 등 역임. 1980년 8월 8일 83세를 일기로 타계.

김만술(金萬述) 육군대위(1929.10.28∼1991.5.28)

김만술 육군대위는 1929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 일본 오사까 공업학교를 졸업, 광복이후 1947년 6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음.
6·25전쟁이 일어나자 평양탈환전투 등 주요 전투에 하사관으로 참전, 탁월한 지휘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53년 7월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 국군 1사단 11연대 6중대 2소대장으로 경기도 연천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베티고지(Betty고지)에 투입됨.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전 전선에 걸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전개하던 시기, 베티고지는 1사단의 전초기지로 최대의 전략 요충지였음. 1953년 7월 15일 소대원 35명과 함께 베티고지를 지키고 있던 김만술 소위는 야음을 타고 인해전술로 공격해 오는 중공군 제1군 1사단 2개 대대 규모의 적군을 맞아 5번의 공방전을 벌이며 13시간동안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그는 초인적인 지휘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포병의 진내사격을 요청, 적을 제압하고 또 선두에서 육탄전을 벌여 적 314명을 사살, 450명을 부상시키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

김만술 소위는 이 전투에서 탁월한 리더쉽과 용감한 전투정신을 인정받아 금성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십자훈장을 받았으며, 1960년 대위로 예편한 후에는 1977년 시흥에 상이군경용사촌을 건립하고 대한상이군경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다 1991년 타계하였음.

현시학(玄時學) 해군소장(1924.1.3∼1989.7.18)

현시학 해군소장은 함남 영생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되자 공산군을 피해 월남하여 1946년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 전신) 1기로 임관했다.
그는 임관이후 초창기 해군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각종 대·소 작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특히 1950년 7월 첫번째 참전했던 서해안 봉쇄작전에서는 신병 70명을 출동중에 훈련시켜 남하중인 12척의 적 수송선단을 격퇴하였으며, 50년 8월 통영작전에서는 고성으로부터 통영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맞아 백발백중의 함포사격으로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을 지원함으로써 낙동강 최후방어선을 수호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적이 부설한 기뢰를 제거하는 목포항 소해작전, 3,000여개의 기뢰를 제거하는 원산만 소해작전, 황해도 월사리 아군 특수부대 상륙지원, 황해도 피난민 구출작전에 참전하여 6만여명의 피난민을 구출하는데 기여하는 등 전쟁기간 중 지상작전 지원과 피난민 철수에 지대한 공을 세움으로써 금성을지, 금성충무, 미국동성훈장 등을 받았다.

6·25 전쟁 이후에는 1전단사령관, 함대사령관, 해군사관학교 교장 등 주요 직위를 수행하며 해군발전을 위해 크게 이바지했다. 1966년 해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모로코, 이란, 멕시코 대사직을 수행하며 외교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으며 1989년 타계했다.

안창관(安昌寬) 해병대령(1924.1.8∼1971.3.30)

안창관 대령은 평남 평원에서 독립운동가 안용운 선생의 2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나 어린시절 부친을 따라 만주로 들어가 하얼빈 공립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금강소학교에서 수년간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되자 귀향한 후 가족과 함께 월남하였다. 1948년 9월 해사후보생 특별교육대 2기생으로 임관하여 6·25 전쟁 전 진주와 제주도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낙동강전선이 위태로울 때, 김성은 부대의 7중대장으로서 마산방면으로 침공해오는 적 정찰대대를 진동리에서 기습공격으로 격멸, 국군사상 최초로 전 부대원이 일계급 특진했다.
이후 통영상륙작전에 참가, 다른 대원과 함께 약 500여명의 적을 사살하여 해병대의 용명을 떨침으로써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이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도 참가하였다. 또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도솔산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한국 해병대의 용명을 떨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외 대우산 전투와 김일성고지 전투 등 전쟁기간 내내 전투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휴전 후 제2상륙전단장, 진해기지 참모장, 해병대사령부 군수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해병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전투유공으로 금성을지훈장, 금성충무훈장, 미동성훈장 등을 수상했다.
해병대 창설요원으로 시작하여 전쟁 전 공비토벌로부터 전쟁이후 수많은 격전지를 누비며 청춘을 전장에서 보낸 그는 1966년 해병대령으로 전역했으며 1971년 타계했다.

손원일 해군중장(1910.5.5∼1980.2.15)

손원일 제독은 1910년 감리교 목사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 씨의 장남으로,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여 한국해군을 창설하고 오늘날과 같이 막강한 해군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닦는데 일평생을 바쳤다.
그는 1930년 중국 상해 국립중앙대 농학원 항해과를 졸업하고 상해 해관 경비함과 상선 승조생활을 거쳐 독일 상선 람세스호에 승선하여 영어 등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등 국제감각을 익혔으며, 1940년에는 동화양행(무역회사) 상해지점장으로 근무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그해 11월 70여명의 선각자와 함께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하였고, 1948년 9월 1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1948년 10월 여·순사건시 해안봉쇄와 함포사격으로 사건을 진압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참모총장 재임당시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 해군과 함께 동·서·남해에서 재해권을 확보하고, 특히 6월 25일 대한해협 해전을 시작으로 통영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 등 해·육상 주요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6·25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후 그는 1953년 6월 국방장관, 1957년 7월에 초대 주 서독대사로 부임하여 국방력 건설은 물론 국가 외교발전에도 지대한 공로를 세웠으며 1980년 2월 25일 7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생전에 미국은성훈장, 태극무공훈장 2회, U.S medal, 공비토벌기장, 6·25 및 UN 종군기장 등 수많은 훈·기장을 수상했다.
해군에서는 그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고자 1997년 11월 해군 창설 52주년을 맞아 진해 해군작전사령부에 故 손원일 제독의 청동입상을 세우고 동상 제막식을 거행했다.